■ 박일환의 낱말여행 (41) / 물뽕
■ 박일환의 낱말여행 (41) / 물뽕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4.1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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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인이 만든 보통명사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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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강남 학원가에서 충격적인 마약 음료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에게 집중력 향상에 좋다며 마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한 뒤, 부모에게 연락해 자녀가 마약을 먹었다며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고 했단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범행 수법도 끔찍하지만, 그만큼 우리나라가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마약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히로뽕이 아닐까? 일본에서 건너온 히로뽕(hiropon)과 영어 표현인 필로폰(philopon)은 둘 다 표준어로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히로뽕은 본래 일본에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합법적으로 만들어 팔던, 각성제 효과가 있는 약품명이었다. 주로 전쟁에 지친 병사들에게 피로 회복과 졸음 해소를 위한 처방약으로 제공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원조는 아니고, 서양에서 먼저 개발해서 보급하던 각성제를 본떠서 만든 게 히로뽕이었다. 속칭으로 줄여서 부르는 뽕도 국어사전 표제어에 있으며, 약품으로 부르는 정식 명칭은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이다.

히로뽕은 보통 가루 형태로 되어 있지만 이후 마약 조직에서 액체로 만들어 보급한 것도 나오기 시작했고, 그게 이른바 물뽕이라고 부르는 약물이다.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몰래 주입시켜 흔히 데이트 강간 약물로도 불린다.

국어사전에서 물뽕을 찾으니 의외의 낱말이 나왔다.

물뽕: <식물> 비나 이슬에 젖은 뽕잎.

한자어로는 우상(雨桑) 혹은 유상(濡桑)이라고 한다. 누에가 물뽕을 먹으면 설사를 하다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꼭 물기를 제거한 다음에 주어야 한단다. 마약인 물뽕이야 당연히 금지 약물이지만 누에에게 주는 물뽕도 금지 음식인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데 마약을 뜻하는 물뽕은 최근의 신조어까지 두루 싣고 있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도 찾을 수 없다. 좋은 낱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낱말이라면 국어사전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뽕이라는 낱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이 낱말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퍼뜨린 건 마약 수사를 담당하던 김희준 검사(지금은 변호사로 활동 중)였다. 광주지검 강력부에 속해 있던 김희준 검사는 1998년에 히로뽕 밀매 조직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수사해서 일당을 검거했다. 그런데 압수물이 분말 형태가 아니라 생수통 두 개에 담긴 액체였다. 범인들에게 물으니 제조 기술이 발달해서 히로뽕을 물로도 만든다고 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그냥 물이라는 답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액체로 된 히로뽕을 감정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희준 검사는 액체 샘플을 미국에 있는 감정기관에 보내 신종 마약이라는 답변을 얻어냈다. 영화 <공공의 적2><수리남>에 나오는 검사의 모델이 바로 김희준 검사였다.

물뽕의 정식 명칭은 감마 하이드록시부티르산(Gamma-Hydroxybutyric acid)이고, 줄여서 지에이치비(GHB)라고 부른다. 신종 마약 사범을 검거한 후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기자들에게 마약의 종류를 설명하려니 명칭이 너무 길어 고심 끝에 물로 되어 있으니 물뽕으로 부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낱말이란 이렇듯 부르기 쉽고 들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낱말은 누가 처음에 만들어 퍼뜨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물뽕은 저작권이 확실한 낱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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