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모시각비에 새긴 신영락의 ‘백저사’
■ 기고 /모시각비에 새긴 신영락의 ‘백저사’
  • 석야 신웅순
  • 승인 2023.04.20 08:13
  • 호수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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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일 한사모시타운 일원을 돌아본 신웅순 전 중부대 교수가 모시각비에 새긴 신영락의 백저사를 설명하는 글과 함께 글을 지은 신영락의 백저사 친필초본을 보내왔습니다. 69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제33회 한산모시문화제를 앞두고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산모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임성순 전 서천군청 기획실장이 신웅순 교수와 최혜진 교수에서 모시각비 건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성순 전 서천군청 기획실장이 신웅순 교수와 최혜진 교수에서 모시각비 건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산 모시 타운 안쪽 산 언덕에 모시각이 있다. 모시각은 모시의 수호신을 모신 곳이다. 거기에 자연 대리석으로 세운 모시각비가 있다. 앞면에는 신영락의백저사(白苧詞), 뒷면에는한산 모시의 유래가 새겨져 있다.

신영락(1799-1860)은 석북의 증손자로 숭문 팔문장 중의 한 사람이다. 팔문장은 석북 3형제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와 석북의 장남 신우상, 차남 신기상, 4남 신석상 그리고 손자 신병, 증손 신영락을 이르는 말이다.

신영락은 자는 교일(敎一), 호는 괴음(槐音)이다. 신병의 장남으로 1843(헌종9) 45세에 진사에 올랐다. 천성이 관후하고 문사가 풍요하며 오랫동안 경서를 배우고 닦았다. 법도가 있어 문사들의 규범이 되었다. 저서에활루만음(活樓漫吟)문집이 있으며 여기에백저사(白苧詞)가 실려 있다. (신구순, 어성 신담과 그 가계)

백저사15세에 당시 시집온 새색씨의 모시 짜는 모습과 삶의 애환을 표현한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시이다.

한산고을 아가씨 그 나이 열 다섯 살
토담집에 자라나서 가는 모시 짜고 있네
가냘프고 여린 자태 쪽을 지고 시집가니
규수범절 묻지 않고 길쌈 재주 먼저 묻네.
가위질 바느질은 아직 손에 서툴러도
다만 하나 길쌈 등불 한 짝으로 맺었다네
십리길 친정집이 눈에 선해 아롱대나
부모님께 근친 못해 마음만이 애닯았네
백설 같은 고운 손이 나는 듯이 능란하여
하루종일 부지런히 베틀북 울려대네
짧고 짧은 베치마는 겨우 허리 가리는데
다닐 때 걸쳐입고 어색한 빛 전혀없네
동지 섣달 흐르는 물 싸늘하게 얼어댈 때
트고 찢긴 열손가락 북틀 같이 얽어맺네
남편네는 더디짠다 소리소리 짜증내도
해일장 대어짠다 분명하게 말을 하네
세모시 높은 값은 비단보다 못지 않고
단오 때 입고 나니 계절과도 어울리네
붉은 입술 푸른 머리 여기저기 관가기생
보석비녀 멋진 소매 큰 고을의 선비님들
검은 인끈 현관님은 자기마다 가졌으니
모시 짜서 바치기를 기다리지 않게 됐네
서늘한 장막 속에 편히 누운 귀한 분들
이 모시에 쏟은 정성 어찌나 아시리요
해마다 박한 이익 거듭 쌓여 부자되니
몸과 마음 다 바치는 농사보다 되려낫네
백성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보신다면
시경속의 칠월 한 편 횃불 같이 밝고 밝아
원하온데 작은 정성 실낱 같은 보탬 되어
임금님은 조서 내려 어진 신하 상 주겠네

괴음 신영락 지음 송향 노흥래 번역, 우송 박우철 씀
서기 일천구백구십삼년 이월일일
서천군수 세움

▲신영락의 「백저사」모시각비
▲신영락의 「백저사」모시각비

모시각비는 서천군 전 문화공보실장이었던 임성순 선생님이 재직시에 세운 시비이다. 맨 위 둥근 모양은 모시굿을, 옆면은 모시옷 소매를, 양옆으로 쳐진 줄들은 씨줄과 날줄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시 서천고등학교 교장이었던 노흥래 교장 선생의 감수를 받아 한문 교사인 최윤용 선생이 번역했고 뒷면한산 모시 유래는 구인환 교수의 감수를 받아 임성순 실장이 글을 썼다. 한글 글씨는 구영환 선생, 한문 글씨는 박우철 선생이 썼다. 모시각비는 공주대 김경화 교수님이 설계했다.

EKDMADMS 각비 뒷면 한산모시의 유래이다.

여기는 충남 최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한산 여기에 백의 민족의 상징인 한산모시의 전통문화가 길이 빛나고 있다.
한산모시는 아득한 신라 때에 한 노인이 남편의 병으로 이곳 건지산 토굴에서 백일 기도를 올리던 중 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신령님이 현몽해 다음날 건지산 기슭에 나가보니 이름 모를 약초와 모시풀이 있어 약초로는 남편의 병을 고치고 모시풀은 한산면 지현리 건지산 기슭에 심어 한산모시를 처음으로 생산해 세세년년 그 이름을 떨치고 고장의 빛이 되어왔다.
한산모시는 한산을 중심으로 재배가 확산되어 신라시대에는 저산팔읍 길쌈놀이와 함께 널이 퍼지고 고려시대는 명나라의 공물로 유명해지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으로 그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한산모시는 백의와 결백의 상징으로 백옥같이 희고 우아해 하절기의 품위 있는 옷감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구나 모시의 종주인 한산모시는 모시중의 모시로 널리 떨치고 있으니 이 고장의 자랑이며 생활문화의 한 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산모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백의의 혼을 널리 선양하여 세계 속의 모시로 그 자리를 굳히고 빛내기 위하여 군민의 열망으로 일천구백팔십구년 시월에 시작된 저산문화제와 자랑스러운 한산모시의 수요를 크게 넓혀 모시문화를 발전시키고 한산모시의 원류를 찾고 풍성한 내일을 기원하는 서천군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한산모시 마을이 한산모시의 향토적 향훈이 백의 민족의 순백과 조화되어 향토문화의 창조와 선양의 산교육의 광장이 되리라 믿는다.
빌건데 천지신명은 이 간절한 서천 군민의 소원을 수렴하시어 한산모시와 이 고장에 만복을 내려주소서.

      구인환 짓고 구영환 씀

▲비에 뒷면에 새긴 한산모시 유래
▲비에 뒷면에 새긴 한산모시 유래

임성순 실장이 특별히 한산모시의 유래와 모시각비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최혜진 교수, 허정균 편집국장, 한경석 군의원, 필자 이렇게 모였다.

이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올렸어유?”

아이구, 말도 말어유

임성순 님의 충청도의 이 말 한 마디가 모시각비 세우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주고도 남았다. 필자는 석북공의 8손이요 영락의 5손이다.

모시각에서 내려다 보면 모시타운 전부를 조감할 수 있다. 한산모시 축제 때마다 모시신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영락 묘소는 화양면 대사동 석북의 묘 좌측 날 너머에 있고 거기에 묘표석이 있다.

그날은 만산 천지가 벚꽃 대궐이었다.

구순 종친 형님께서 영락 공의백저사친필 유묵 사진을 보내주셨다. 형님과 함께 동행해주신 님들께 감사드린다.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1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2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3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신영락의「백저사」 친필 초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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