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42) / 더벅머리
■ 박일환의 낱말여행 (42) / 더벅머리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4.20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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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패 기생을 부르던 이름
삼패 기생을 부르던 이름
삼패 기생을 부르던 이름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는 선배를 찾아가 위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행한 이들끼리 막걸리라도 한잔하고 가자는 말에 들른 족발집에서 이런저런 화제 끝에 기생 등급을 나누는 일패, 이패, 삼패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를 꺼낸 소설가 이시백 형은 예전에 갈보 콩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을 냈다. 표제작인 갈보 콩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제 밭의 콩들은 죄다 을석네 미제 콩과 붙어먹어 어디 씨도 모를 화냥질 콩이 된 셈이 아닌가.”

이웃이 미국에서 수입한 지엠오(GMO) 콩을 심었는데, 벌과 나비가 그 집 콩의 꽃가루를 자신의 밭에서 자라는 콩꽃에 묻히는 바람에 토종으로 여기고 기른 콩들이 모두 화냥질 콩이 돼버렸다며 한탄하는 대목이다. 소설의 제목을 갈보 콩으로 지은 이유다. 농촌의 현실을 풍자한 소설로 호평받았으며, 독특한 제목이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단편집 제목으로도 삼았다. 그런데 작품성과 별개로 엉뚱한 문제가 발생했다. 학교 도서관 사서들로부터 참 좋은 소설집인데 제목 때문에 도서관 구입 도서로 신청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들려온다고 했다. 당연히 표지에 갈보 콩이라고 적힌 책을 들고 학교로 강연을 나갈 수도 없게 됐다며 이시백 형은 후회막급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그 소설집을 내가 한때 대표를 맡고 있던 출판사에서 냈고, 책 제목도 내가 붙였기에 죄송한 마음이 들곤 했다.

기생 등급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나는 아래 낱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더벅머리: 예전에, 웃음과 몸을 팔던 계집. 급이 삼패(三牌)도 되지 못한 계집으로서 오늘날의 술집 여자나 갈보와 같은 여자를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다른 국어사전들의 풀이도 비슷하다. 하지만 삼패도 되지 못한다고 한 건 사실과 다르다. 사학자 이능화가 1927년에 기생들의 유래와 역사를 기록해서 펴낸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탑앙모리(搭仰謀利)는 역칭삼패(亦稱三牌)라는 구절이 나온다. 탑앙모리가 삼패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한동안 매춘 여성을 왜 더벅머리라고 부르게 됐는지 이유를 알 길이 없어 답답했는데, 탑앙모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탑앙모리(搭仰謀利)다방모리를 음차한 것으로 더벅머리와 통하는 말이다. 모리는 머리의 비표준어이고, 1920~1930년대 신문을 보면 더벅머리와 함께 다방머리와 다박머리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 삼패 기생들이 머리에 곱게 쪽을 찌지 않고 아무 때나 쉽게 풀 수 있도록 다발처럼 틀어 올렸다고 해서 다방모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더벅머리는 삼패도 되지 못한 게 아니라 삼패 기생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해야 한다.

일패는 시와 가무에 능한 높은 수준의 기예를 갖추고 몸을 팔지 않는 고급 기생이며, 이패는 그 아래 등급으로, 흔히 은근짜(慇懃-) 혹은 은군자(隱君子)라고 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상황에 따라 은근히 몸을 팔기도 한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삼패는 연회 자리에 불려가도 잡가 이상은 못 부르게 했으며, 기예보다는 몸을 파는 게 우선이었다. 당연히 일패 기생들은 삼패를 기생 무리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제국 시기에 삼패들을 수표교 부근의 시동(詩洞)에 모아 집단 거주하도록 했다. 삼패들이 사는 집을 상화실(賞花室), 즉 꽃을 감상하는 집이라 불렀다는 게 이능화의 기록에 나온다. 감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꺾어볼 요량으로 가는 집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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