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어느 할머니의 그늘
■ 모시장터 / 어느 할머니의 그늘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3.06.14 22:01
  • 호수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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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고개 숙인 채 앉아 있다. 허리가 굽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는 걸 보니 숨쉬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다. 할머니가 자신의 몸으로 할아버지에게 그늘을 만들어준다. 할머니는 양 손에 찬거리를 든 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무릎 꺾고 풀썩 주저앉았을까.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할머니에게는 큰 산이었을 것이다. 이젠 아내의 그늘도 되지 못하는 깡마른 마른 나무가 되었다. 할머니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엇하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체념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런 할머니의 얼굴은 난생 처음이다. 며칠째 그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아내의 작은 몸 그림자에도 남편엔 쉼터조차 못 되니 삼자인 내가 외려 눈물이 날 것 같다. 젊어서 아픈 것은 그래도 괜찮다. 기력이 다한 할아버지에게 아픈 것은 참으로 서럽다. 그 얼굴 바라보아야만 하니 어쩌지 못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 때의 편안한 용안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승의 무거운 짐을 놓고 떠나니 얼마나 편안했을까. 아버지는 일찍 떠나 이별이 힘들었으나 어머니는 그나마도 70년은 사셨으니 편히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인생이 가는 것은 단 한 번 뿐이지 않는가.

어머니는 내 나이 때 돌아가셨다. 내가 어머니 나이를 먹고 보니 세월은 화살 같이 빠르고 인생은 뜬구름 같이 허무하다.

인간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은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철가일부

사후 만반진수면 무엇하나, 살아 생전 일배주만도 못한 것을. 요즈음 백세인생이라 하나 병든 날,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고 나면 그래 맞다, 사십년도 채 못사는 것이 인생이다.

누군가는 먼저 가야 한다. 누구나 다 독거노인이 되어 이승을 떠난다.

우리 세대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돈 버는 데에만 급급했다. 가정 꾸리고 자녀 가르치기에 평생을 다 바쳤다. 노후 대책은 엄두도 못 냈다. 할머니들은 그래도 형편이 낫다. 아들, 딸 집에서 반찬 만들고 나물 다듬고 멸치똥이라도 까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들은 무엇 하나 하는 게 없으니 방구석의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요리라도, 용돈 벌 취미라도 배워둘 걸, 이렇게 후딱 나이들 줄 꿈에나 생각했을까. 참 딱한 신세이다. 우리 세대는 부모 모시고 사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은 자식들도 빠듯한데 발 붙이며 살 수가 없다. 생일 때나 명절 때 자식들이 주는 용돈 손주에게 해주기도 모자란다. 위 아래로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되었다.

남자들은 마누라한테, 자식들한테 천대받고 술도 힘이 없어 못 먹으니 그 마음인들 어떻겠는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마누라 밖에 없다는 것을 다 뒤에서야 깨닫게 되니 이도저도 서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할머니의 그늘에 쉴 수만 있다면 그만으로도 하늘이 주신 커다란 축복이요 행운이요 선물이다.

서 있으면 땅이요 걸으면 길이 된다는 말을 전해주고 얼마 전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술 한 잔 기울이자 했는데 봄길 따라 훌훌 갔다. 어쩌란 말이냐. 별 거 아닌 것이 인생이라는 걸 요새와 뼈저리게 느낀다.

- 2023.5. 14,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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