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마서면 신포리 공덕마을 공덕산을 지키자
■ 기고 /마서면 신포리 공덕마을 공덕산을 지키자
  • 유승광 / 서천지역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23.06.21 21:35
  • 호수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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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산과 공덕마을 역사 문화 유적 조사보고)
유승광 / 서천지역사회연구소 대표
유승광 / 서천지역사회연구소 대표

1. 공덕산은 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공덕(功德)은 본래 장차 좋은 과보를 얻기 위하여 쌓은 선행이라 한다. 그래서 공덕산은 마서면 신포 1.2, 산내리 사람들이 정성을 드려 산신 또는 토속신을 모셨던 산이다

특히 공덕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적 요소가 가미 되어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절터는 공덕마을 차옥자씨가 거주하고 있는 산수골에 있었다. 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300년 전부터 최근 1978년까지 존재하였다. 1970년대는 공덕마을 박문희 씨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다 입적하였다.

당시에는 부처님께 공덕을 쌓았던 작은 절이었지만 주변의 유물로 보아 300년 전에는 규모를 갖춘 절로 여겨진다. 이유는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자기편을 근거를 들 수 있다

 

2 공덕은 산 이름 뿐만이 아니라 공덕 마을 이름이 되었다. 마을이 먼저냐 산 이름이 먼저냐 따질 겨를도 없이 마을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공덕산 정상을 찾아 당산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공덕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소중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공덕마을 사람들은 평야 지대에서 생산되는 쌀농사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덕산은 공덕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불교적으로는 부처산이다. 또한 오랜 역사 속에서 땔감을 제공하여 온화한 마을을 만들어주어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공덕산은 종합하여 볼 때 마을의 진산으로 보호해야 마땅한 산이다.

 

3 공덕산은 189411월에 동학농민군이 화양산을 점령하였을 때 농민군의 보급대 역할을 했던 산이다.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제폭구민의 구호를 외치며 안으로는 썩어빠진 양반사회를 척결하고 밖으로 일본놈들을 쫓아내려는 자주 정신으로 무장했다. 이 때 신포리에 살던 나방환은 고부 땅 황토현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자랑스럽게 전사하였다. 나방환의 고손 나해균이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에 신고하여 동학혁명유공자로 등록되어 있다. 신포리 사람 나방환이 고부까지 내려갈 정도이면 신포리 공덕마을에 동학이 전파되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공덕산은 공덕마을 사람들은 금강을 건너온 함열 옥구 동학 농민군과 공덕산에서 연대하여 화양산 전투를 지원한 역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서도 화양산을 바라보는 첫봉우리에는 동학농민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사기그릇과 옷가지 등이 흩어져있었다 한다.

 

공덕마을의 이름과 함께 존재하는 공덕산을 없애버리면 전통마을이 사라지게 된다. 지방소멸로 인구가 급감하는 시대에 전통마을을 지키는 것은 한국인을 보존하는 초석이다.

또 공덕마을 사람들은 논농사를 생업으로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공덕을 공덕산을 찾아 문제해결을 호소했던 산이다. 이 또한 공덕산을 지키는 것은 공덕마을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또한 공덕산은 동학농민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포사람 나방환이 신포리 출신으로 이미 황토현 전투에 참여한 바 신포리 공덕마을사람들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현장이다.

이에 신포리 공덕산은 전통마을 공덕 마을 지키는 수호산이며 이들의 정신적 지주 즉 하늘의 기둥이 되는 천주산이다. 그러므로 공덕산은 보존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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