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52) / 김찬국
■ 박일환의 낱말여행 (52) / 김찬국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7.06 09:31
  • 호수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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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국과 찬국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여름에 입맛을 사로잡는 음식으로 어떤 게 있을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입맛과 취향에 따라 여러 음식 이름을 대겠지만 웬만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시원한 냉국 아닐까? 얼음을 띄운 찬물에 간장과 식초를 탄 다음 오이나 가지 혹은 미역을 넣은 냉국 한 사발을 들이켜는 맛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연세대 신학과 교수로 있던 김찬국(1927~2009) 교수는 유신정권을 비판하다 감옥 생활까지 했다.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다는 이력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분에 대한 몇몇 일화를 접한 적이 있는데, 그중에는 가끔 농담 삼아 나는 내 이름이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사람이야.”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어사전에는 강감찬, 이순신, 정몽주, 유관순 등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 이름이 꽤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그리고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시에 아직 생존해 있던 인물 이름이 국어사전에 오르게 됐을까? 김찬국 교수의 말을 듣고 직접 국어사전을 찾아본 이들도 있을 텐데, 아래 낱말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을까?

김찬국: 구운 김을 부스러뜨려 넣어 만든 냉국.

찬국은 냉국을 달리 부르는 명칭이다. 그렇다면 김찬국 대신 김냉국이라는 말도 썼을 법하고 실제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국어사전에는 김냉국이라는 낱말이 올라 있지 않다. 대신 오이냉국, 가지냉국, 미역냉국 같은 낱말만 보인다. 아울러 오이찬국, 가지찬국, 미역찬국도 김찬국과 나란히 표제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해 먹는 이가 드물긴 하겠지만 파를 넣은 파찬국도 국어사전 표제어에 올라 있다.

김찬국 교수의 농담은 다른 식으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김응교 시인이 페이스북에 이런 회고담을 올린 적이 있다.

교수 김찬국 목사님, 이분 책을 읽고 이분께 배우려고 그 학교에 입학했는데, 김찬국 교수님은 해직되고 감옥을 다녀오시고, 내가 졸업할 때 복직하셨다. 내 결혼식 때 덕담해주셨던 개인적 관계를 넘어, 법정에서 학생들 풀어달라며 아이처럼 우셨다는 교수님,
내 옆에 앉으면 김과 찬과 국이 있어요.”

썰렁한 농담 하시며 당시 야만스런 사회를 잠시라도 행복하게 하셨다.

찬국이나 냉국 대신 창국(-)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있을까? 1924년에 이용기가 펴낸 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창국이라는 것은 찬국이니 여름에 먹는 것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외창국(오이창국), 메역창국(미역창국), 김창국, 파창국 만드는 법을 기록해 놓았다. 옛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면 1930~1940년대만 해도 창국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슬슬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찬국과 냉국에 밀려 국어사전에도 오르지 못했다. 창국(-)에 쓰인 한자 창()은 화창하다는 뜻을 지녔다. 그만큼 시원한 맛을 준다고 해서 만든 용어일 것이다. 창국이라는 말이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김창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국어사전에 실려 있다며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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