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53) / 서수필(鼠鬚筆)
■ 박일환의 낱말여행 (53) / 서수필(鼠鬚筆)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7.13 12:20
  • 호수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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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재료가 되는 동물의 털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지난주에 김찬국이라는 낱말을 가지고 풀었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소개했더니,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 중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 이름인 서호필이라는 낱말도 있다는 내용의 댓글이 달렸다.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 중에서 사람 이름과 연결되는 경우를 찾아보면 꽤 많은 사례가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거나 서호필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서호필(鼠毫筆): 쥐의 털로 만든 붓.

붓은 대개 동물의 털로 만든다. 그중에서도 가늘고 부드러우며 탄력이 뛰어난 털을 재료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동물이 실험 대상으로 등장했을 테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명품 붓을 만들기 좋은 털이 가려졌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붓으로 이름난 것들을 추리면 담비의 털을 이용한 초모필(貂毛筆), 날다람쥐의 털을 이용한 청모필(靑毛筆), 족제비의 꼬리털을 이용한 황모필(黃毛筆) 같은 것들이 있다. 특이한 경우로는 노루의 겨드랑이와 앞가슴 털을 뽑아 만든 장액필(獐腋筆)이 있고, 서호필과 앞 글자만 다른 양호필(羊毫筆)도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양털을 이용한다고 했지만 전문가들 말로는 염소의 털을 썼다고 한다.

지금까지 거론한 동물들은 그렇다 쳐도 왜 하필 쥐의 털을 이용해서 붓을 만들었을까? 쥐의 털이 붓을 만드는 재료로 적합하다고 여겨 그랬겠지만, 쥐는 일단 징그럽다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털 자체도 길이가 짧아 붓의 재료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국어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돼지 털로 만든 돈모필(豚毛筆)과 개털로 만든 구모필(狗毛筆)도 있었다고 하니 쥐의 털로 붓을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긴 하다. 일단 다른 낱말 하나를 더 보자.

서수필(鼠鬚筆): 쥐의 수염으로 만든 붓.

이번에는 쥐의 털이 아니라 수염을 이용해서 만든다고 했다. 수염이라면 가늘고 길이도 적당해서 붓을 만들기 좋은 재료가 되겠구나 싶다. 그런데 이 서수필이 예로부터 꽤 귀하고 좋은 붓으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서예가 왕희지가 남긴 유명한 글인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서수필로 썼다고 전한다.

쥐의 수염은 몇 가닥 되지 않아 서수필을 만들려면 약 200마리의 쥐가 필요했다고 한다. 아무리 쥐가 흔하다지만 서수필 하나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고, 그래서 서수필이 더욱 귀한 붓으로 등극했다. 우리 옛 그림으로 윤두서 자화상이 유명한데,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그린 수염은 서수필이 아니면 못 그렸을 거라고 한다. 서호필에 쓰인 한자 호()는 터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붓의 촉을 뜻하기도 한다. 서호필은 아마도 서수필과 같은 종류의 붓을 가리키던 말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온갖 짐승의 털로 붓을 만들었는데, 사람의 털로 만든 붓은 없었을까? 태모필(胎毛筆)이라고 하는 게 있다. 아기의 배냇머리를 잘라서 만든 붓이어서 배냇머리붓으로도 부른다. 옛날에 아기가 자라 과거 시험에 붙거나 장원급제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 준 붓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가 퍼지면서 최근에는 자식이 커서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태모필을 기념 삼아 만드는 부모들도 있단다. 그래서 붓을 만드는 유명한 모필장들이 너도나도 태모필 제작 주문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식이 똑똑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싶다. 태모필은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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