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공자님께서는 제자 염옹을 두고 이렇게 평하신 바 있다. “염옹은 가히 임금이 될 만한 인물이다”<염옹가사남면雍也可使南面 논어옹야6-1>
공자님의 제자를 통털어 삼천명이라 하는데 그중에 임금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칭찬을 받은 제자는 염옹이 유일하다. 공문의 제자 중에 염씨 성을 가진 제자는 셋으로 염백우와 염옹과 염구로 공문삼염孔門三冉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형제인 연고다.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문왕周文王의 열 번째 아들 염계재冉季載의 후예로 춘추春秋 말기의 공자님의 문도로 훗날 학자와 정치가의 반열에까지 오른 염씨 삼형제의 인물들이다.
염씨가보冉氏族譜에 따르면 염옹의 부친 염리冉離는 안씨顔氏를 아내로 맞아 염백우를 낳았으며 한동안 자녀가 없다가 늦둥이로 염옹을 낳자마자 아내가 죽었고 갓난아기를 키울 수 없어 바로 후처를 들였는데 공서씨公西氏이다. 여기서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가 염구冉求다. 그래서 염옹과 염구는 연년생이다.<이본에는 같은 해로 기록함>
공서씨는 공자님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터라. 내 자식 남 자식 가릴 것 없이 삼 형제 모두를 공자님 문하에 들여 공부를 시켰다. 집안은 몹시 가난했으나 아들들 공부만큼은 기를 쓰고 시켰다는 열성적인 모친이다. 횡거 장재 선생의 제자이자 북송 때 학자 여대림呂大臨에 따르면 훗날 맹자의 모친 장씨 부인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일문삼현一門三賢’이라는 말이다. 염씨 문중에서 3명의 현자가 났다는 말이다.
맏형인 염백우는 벼슬이 30대 쯤에 이르러 중도지방을 다스리는 재상인 중도재中都宰에 올랐으나 병으로 요절한다. 이로 인해 공자님은 죽는 날까지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에 대한 판단들을 누구에게도 물어볼 데가 없었다며 염백우를 그리워했다는 채침의 말이 전한다
시교尸佼가 쓴 시자尸子 책 산견제서문휘집散見諸書文彙輯에 따르면 공자육자孔子六咨가 있는데 공자님께서 군주나 재상들하고 시국 담화나 거상치국을 논할 때 적절한 말이 상황에 순간적으로 나오지 못할 때 자문을 구했다는 여섯 명의 제자를 말한다. 생사의 절체절명사안을 결정할 때는 자로에게 물었고 예복이 격식에 맞는가에는 공서화에게 물었으며 재물이 순리에 맞게 쓰는가는 자공에게 물었으며 말을 상황에 맞게 하는가에는 재여에게 물었으며 옛 문헌과 지금의 문헌을 비교할 때는 안회에게 물었으며 사소한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염백우에게 물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중궁부천민야仲弓父賤民也’(중궁의 아버지는 천민이다)는 말이다. 중궁仲弓은 염옹冉雍의 자字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雍也편 6-4문장 주註에서 주자는 이렇게 주석을 단다. 중궁의 아버지는 미천하고 행동은 악했다.<중궁부천이행악仲弓父賤而行惡> 이런고로 공자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고부자이차비지故夫子以此譬之> 아버지의 악행이<언부지악言父之惡> 그 아들의 훌륭함을 폐기할 수 없나니<불능폐기자지선不能廢其子之善> 중궁 같은 어짊<여중궁지현如仲弓之賢>은 저절로 세상에 쓰임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자당현용어세야自當見用於世也>
그렇다. 사람이 비록 쓰지 않으려 해도<언인수불용言人雖不用> 하늘이 반드시 버리지 않는다<신비불사야神必不舍也>는 말이다. 그 중심에 공부가 있는 거고. 공부한 사람은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해도 하늘이 반드시 들어서 쓴다는 말이다. 그런 연고로 철인 순자는 “공부는 그만두어서는 안된다.<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사람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두가 같다.<생이동성生而同聲> 그러나 성장하면서 사는 곳도 습관도 달라지는 것은<장이리속長而異俗> 공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교사지연야敎使之然也>”고 말했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논어 첫 글자로 학學을 말씀하신 바 있다. 이것을 후학 순자는 한 글자 덧붙여서 공부를 권하라는 의미의 ‘권학勸學’이라 했다. 이를 쉽게 풀어쓴다면 성현께서 열어놓으신 공부의 문을 후학은 서로 권하여 들어가라는 말로도 읽히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