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는 염씨가 세 명이 나오는데 염백우, 염구, 염옹이 그들이다. 모두가 다 공자님의 제자로 각 분야에서 1인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공부를 일찍 시작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는 게 다른 집안 자제들과 조금은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염백우는 염씨 집안의 좌장으로 공문십철사과에서 안연, 민자건, 중궁과 더불어 덕행이 뛰어난 제자로 분류된다<논어선진편11-2> 염구, 염옹 또한 공문십철사과에 드는 걸출한 인물이다. 그야말로 염씨 집안의 기린아麒麟兒 인 셈이다.
좋은 일에는 더러 액운이 들듯이 염백우는 몹쓸 병에 걸려 스승 공자님을 매우 안타깝게 했던 인물로 공자님은 그를 병문안 와서 탄식하는 장면이 옹야편6-8문장에 기록되어있다, 염백우가 병이 들자<백우유질伯牛有疾> 공자님께서 문병을 가셔서<자문지子問之>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는 말씀하시기를<자유집기수왈自牖執其手曰>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이로구나<망지명의부亡之命矣夫> 이렇게 선한 사람에게 이런 병이 들다니<사인야이유사질야斯人也而有斯疾也> 이렇게 선한 사람에게 이런 병이 들다니<사인야이유사질야斯人也而有斯疾也>”라며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할 만큼 그를 아파했다.
그의 병명은 추측은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회남자淮南子 정신훈精神訓편에 염백우冉伯牛 위려爲厲<려厲는 문둥병라癩를 차용借用한 자임>라는 기록으로 인해 후대에 염백우는 문둥병이라고 알려지긴 했다. 그럼에도 염씨가의 젊은 후학들인 염구와 염옹이 가문을 빛낸다. 싸움과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좌장 격인 염백우의 공이 컸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염구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널 만큼 소심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 때까지 질문하는 공부에 대한 치열함도 있었다. 장자 외편 지북유知北遊16장은 염구를 이렇게 기록한다. 극히 일부만 기록하면 이렇다.
“염구가 공자님께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일들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미유천지가지야未有天地可知耶> 공자님께서 알 수 있다” 라고 답하니 염구는 “잘 알았습니다” 하고 되돌아갔다. 그런데, 자고 난 다음 날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제는 알 거 같았는데 이제는 모르겠다며 다시 물은 것이다.<감문하위야敢問何謂也> 이처럼 염구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 때까지 물어 기어이 알아내곤 했다.
그런 그가 변하게 된 된 것은 벼슬을 하면서부터이다. 논어선진편 11-16문장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계씨의 부유함이 주공보다 더한데도<계씨부어주공季氏富於周公> 염구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더욱 부하게 만들어 주니<이구야위지취렴이부익지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공자님께서 불쾌히 여겨 말씀하시기를<자왈子曰> 염구는 우리는 무리가 아니다<비오도야非吾徒也> 너희들은 북을 울려 성토해도 되니라.<소자명고이공지가야小子鳴鼓而攻之可也>”
이 말이 무슨 말인고하니 노나라에는 임금이 있으면서 또 실세 계씨가 있어서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계씨의 부유함이 나라의 임금보다 더 부자인데도 염구는 그를 위해 세금을 더 거둬들여 부자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또 계씨에게도 세금을 바쳐야 하니 이중부과로 인해 그만큼 백성들은 사는 게 힘들어졌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어려서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고 선했던 사람이 어느 날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초가 되는 사건이다. 사실 염구는 어려서부터 착하고 예의 바르고 효제하는 사람이었다.
한漢나라 대덕戴德이 편찬한 책 대대례기大戴禮記 위장군문자衛將軍文子편에 자공은 염구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노인을 공경하고 고아와 같은 불우한 이를 구휼하며<공노휼고恭老恤孤> 길가는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않으며<불망빈려不忘賓旅> 공부를 좋아하고 사물을 살피며 이렇게 하는 것은 힘들다 여기지 않나니<호학성물이불근好學省物而不懃> 이것이 염구의 모습이다<시염구지행야是冉求之行也> 사문의 형으로부터 이렇게 훌륭한 평을 들었던 사람이 염구였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