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규암나루, 그 백마강
■ 모시장터 / 규암나루, 그 백마강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3.11.24 09:57
  • 호수 11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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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아버지는 군산상고 장학생으로 들어가 은행원이 되기를 바랐다. 취직해 무너져 가는 집안을 일으켜주시길 바랬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책도 없이 명문 학교라는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인들 왜 명문학교를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인가. 집안 사정도 모르고 철없는 나를 바라보았을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을 것인가. 부모가 되어 생각해보니 마음이 아프다. 짝달막한 몸 하나로 고집을 부린 내가 아닌가.

촌놈의 도시 유학생활은 험난했다. 고등학교는 3차례 가정교사, 두어 차례 자취 그리고 몇 번의 하숙 생활이었다. 당시 촌놈들의 도시 유학생활은 농촌의 부유한 방아집 자식 아니면 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3년 때였던가 싶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하숙집 툇마루에 덩그마니 앉아계셨다. 제법 큰 쌀자루가 옆에 있었다.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왔었던 걸까. 하숙비를 갖고 오신 모양이다. 그 때만해도 하숙비는 한 달에 몇 말 그렇게 쌀값으로 따졌다. 시골엔 돈이 없으니 급히 방아 찧어 쌀 한 자루 짊어지고 오신 것이다.

대전에서 서천 가려면 규암나루 백마강을 건너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그래도 중간 중간 시오리는 걸어야한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그 여정을 짊어지고 오셨을 내 아버지.

햇살 비킨 툇마루의 아버지와 쌀 한 자루의 흑백 장면 한 장은 힘들 때마다 내 인생에서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그 때 아버지는 백발이 허연 오십 중반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5년 초등학교 교사를 청산하고 대전의 야간 대학에 편입해 30살이 되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 때 우리 가족도 나를 따라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고향에서 부모님 빚을 다 갚아 마음을 덜어드렸으나 나는 대전에서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했다. 집을 부양해야 하고 내 공부를 해야 하는, 하나가 더 늘어난 주경야독. 내겐 두 번째의 새로운 인생이었다.

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아버지가 쌀자루를 짊어지고 나를 보러 오신 서천에서 대전으로의 여정길을 이제는 도로 장의차로 규암나루 백마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 때는 살아서 이젠 장의차로 건너가고 있었으니 인생은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십년 새에 생과 사가 갈릴 줄을 생각이나 했을까. 한 뼘도 안 되는 생과 사가 아닌가. 그 때 나이 30살이었다. 나는 그동안 깊이 묻어두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햇빛을 얼마나 비추어주실까. 재수 좋으면 20년이다. 사랑할 시간도 모자라고 참회할 시간도 모자란다.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시간일 수 도 있다.

사랑과 참회라는 숙제를 주고 가신 아버지. 그리운 마음도 다 졸업할 때까지 눈 이 어두운 내게 지금도 남은 햇빛을 주고 있으니 눈물겹도록 고맙다. 밤이 되면 행복한 시를 쓰라고 따듯한 달빛을 주실 것이다.

아버지가 육십 둘에 가셨으니 나는 아버지보다 십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어 불러보는 이제금 사부곡이 너무나도 늦었다. 부끄럽다.

2023.10.17. 여여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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