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은 동진 끝 무렵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귀거래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글은 맑기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한 시풍으로 불후의 찬사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으니 일찍이 그는 자녀 다섯을 두었다. 말하기가 다소 조심스러우나 다섯 아들이 모두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는 것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젊잖은 표현인 셈이다. 내 속으로 난 자녀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로서는 절대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을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도연명은 스스로에게 쓴 시 ‘책자責子<자식을 꾸짓다>’에 이렇게 고백한다.
“큰아들 서는 이미 열여섯 살이 되었으나 게으르기 짝이 없고, 선은 조금 있으면 열다섯 살이 되는데 글공부를 도통 싫어하며, 옹과 단은 열세 살이나 됐으나 6과 7조차도 구분을 못하니, 통은 아홉 살에 이르렀음에도 배와 밤, 먹을 것만 찾고 있구나.” 그리고 싯구 말미에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자식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술이나 마실밖에”
춘추 곡량전 제10편 소공19년조에 이렇게 기록한다. 자녀가 어려 5-7세 무렵 물과 불을 만나 화를 입으면<불면호수화不免乎水火> 그것은 엄마의 잘못이며<모지죄야母之罪也>, 자녀가 9-11세가 됐음에도<기관성동羈貫成童> 스승을 만나지 못해 공부를 못했다면<불취사전不就師傳> 그것을 아버지의 잘못이다.<부지죄야父之罪也>.
춘추곡량전의 글로 미루어 보아 자녀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도연명이 천하의 명시인 임에는 천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바, 자녀교육에서만큼은 고개를 절로 젓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주자 선생에게도 자녀는 있었다. 모두 학자가 되기를 바라고 공부를 시켰으나 주자 선생의 자제분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의 학문의 높이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의 벗 동래 여조겸은 그런 주자의 아들들에게 대학자가 되기보다는 출사를 권했고 대학자인 아버지 주자도 이쯤에서 체념을 하고는 자녀들의 출사를 막지 않았다 전한다. 그래도 대학자의 반열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공부는 했던바 자녀들은 모두 지방에 크고 작은 벼슬로 무탈하게 일생을 살 수 있었다. 전한다.
그리하여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이는 직계자녀가 아닌 사위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채침과 황간이 그들인데 주자의 슬하에는 3남5녀가 있는바 5명의 딸 중에 셋은 일찍 죽었으며 첫째 딸은 구봉九峰채침蔡沉의 처가 됐고 둘째딸 주태朱兌는 면재황씨勉齋黃氏 황간黃幹의 처가 된다. 황간은 주자의 제자가 된 뒤로는 오로지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한 인물인데 그의 책상 앞에 이런 글귀를 써놓고 공부했다 하는데, 앞사람의 아름다움을 이어<비전인지미備前人之美> 더욱 발전시키고 크게 빛내리라<발휘이광대지發揮而光大之> 스스로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글귀다. 사실 도연명이라고 해서 자녀들에게 이런 좋은 글귀를 써주지 않았겠는가, 도잠陶潛 시집 잡시雜詩편에 글을 옮겨보면 이렇다. “아름다운 나이는 두 번 거듭 오지 아니하고<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있지 아니하며<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때를 당하였음에 마땅히 공부에 힘 쓰나니<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거늘<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봐도 어느 한 구절 나무랄 데 없는 그야말로 명문장임에 분명할 터, 그러나 이렇게 좋은 글귀를 두고도 도연명의 다섯 아들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니 그런 아들들을 죽는 날까지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부모가 바라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저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해주는 거 그거 말고는 또 뭐가 있겠는가. 조선 선비 간서치 이덕무는 사소절 동규 편에서 자녀의 일 중에 하나를 말하기를, “돈이 생기면 종이를 사며<유전필매지有錢必買紙> 종이를 사면 반드시 책을 만들고<매지필작책買紙必作冊> 책을 만들면 반드시 격언을 써서<작책필서격언作冊必書格言> 잊지 않도록 준비하라<이비망실以備忘失>”했다. 청명한 가을 끝이 다 가기 전에 어서 공부하러 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