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74) 팽형(烹刑)
■ 박일환의 낱말여행 / (74) 팽형(烹刑)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12.28 03:26
  • 호수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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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죽이는 형벌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현기영의 초기 단편소설 소드방놀이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큰 흉년이던 계축년 3, 정의고을에 진휼이 실시되어 기민에게 죽사발을 돌리던 날, 같은 시 같은 곳에서 기민창 색리 윤관영이 부형(釜刑)을 받았다.”

여기 나오는 부형(釜刑)은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낱말이다. ()는 가마솥을 뜻하는 한자이고, 제목에 나오는 소드방은 솥뚜껑을 뜻하는 사투리다. 이 정도의 기본 사실만 가지고는 부형(釜刑)의 뜻을 알아내기 어렵다. 일단 국어사전에 나오는 다른 낱말부터 살펴보자.

팽형(烹刑): <역사> 예전에, 나라의 재물이나 백성의 재물을 탐하는 자를 솥에 물을 끓여 삶아 죽이는 공개형(公開刑)을 이르던 말.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만 나오는 낱말인데 부형(釜刑)과 같은 뜻을 지녔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팽형이나 부형 대신 확팽(鑊烹)과 확탕(鑊湯)이라는 낱말이 실려 있다. 무척이나 끔찍하게 다가오는 형벌이라 진짜로 저런 형벌을 실시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현기영의 소설에서는 죄인이 가마솥 뚜껑 위에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해서 팽형의 시늉만 내는 걸로 나온다. 제목에 놀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다.

서울 종로1가 교보문고 건물 옆에 가면 혜정교터라고 쓴 표지석이 있으며, 거기에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이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여기 나오는 처형 방법이 바로 팽형이었다. 다리 근처에 포도청이 있었던 데다 종로는 시전이 몰려 있는 거리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에 공개 처형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삼도록 하기 좋은 위치였다.
혜정교에서 행한 팽형에 대해서는 노사신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간략한 소개가 나와 있으며, 구한말에 일제 통감부의 관리로 와서 경성형무소장을 지냈던 나카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가 쓴 조선 구시의 형정(朝鮮舊時の刑政)’이라는 글에 조금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카하시에 따르면 다리 위에 큰 아궁이를 만들어 가마솥을 건 다음 죄인을 가마솥의 나무 뚜껑 위에 앉혔다고 한다. 그런 뒤 포도대장이 죄명과 함께 형의 집행을 선포한 다음 실제로는 집행하지 않거나 미지근하게 데운 물에 한 번 처박는 정도로 끝냈다고 한다. 그게 무슨 형벌이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팽형을 당한 사람은 진짜로 죽은 척을 해야 하고, 가족들이 통곡하며 시신을 운반하듯 떠메고 가서 장례까지 치르도록 했다. 이후로 그 사람은 모든 공민권을 박탈당하는 건 물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집안에서만 죽은 듯이 지내도록 했다. 실제로 삶아 죽이지는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현기영의 소설에 나오는 부형도 혜정교에서 시늉만 행한 팽형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혜정교는 일제가 1926년에 도로 개수 작업을 하면서 석교를 콘크리트 다리로 다시 세운 다음 이름을 복청교(福淸橋)로 고쳤다. 일부러 일본식 이름으로 고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법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혜정교는 포청다리로도 불렸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이 포도청을 쉬운 발음으로 보두청이라고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두청이 포도청의 변한말이라는 풀이를 달고 실려 있다. 보두청과 비슷한 소리를 가진 한자 복청(福淸)을 가져와 표기한 거라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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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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