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 공부를 권한 이는 공자님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을 일러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논어 위정편 2-4문장에서 밝힌 바 있으시다. 논어 제5권인 공야장편5-27문장에서는 나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공부관에 대해 무척이나 대견해 하셨다.
하물며 성인께서도 이토록 공부하셨는데 후학으로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칫 성인께 무례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공부를 뜻하는 학學이라는 글자는 백년옥편 437쪽에 이렇게 기록한다. “자녀가子 집안에서冖 손을 모으고臼 가르침을 받아爻 無智에서 벗어난다.”
공부라는 것은 평생공부이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음이 분명하나 현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려서 공부를 많이 해두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훨씬 이롭다는 것이다.
동우董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몹시도 가난했고, 가난을 견디기 위해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황문시랑黃門侍廊의 벼슬에 올랐으며 나아가 헌제獻帝의 글공부 상대가 되어 그야말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나중에는 이로 인해 승상 조조의 미움을 받아 한직閒職으로 쫓겨나서 장삼이사의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세상이 바뀌어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는 시중侍中을 거쳐 대사농大司農의 벼슬에까지 올랐으며 그럼에도 그는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여 학문의 깊이가 노자老子와 좌전左傳의 주석註釋서를 내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고래로 학자를 가르치는 학자를 이름할 때는 두 권의 책을 드는데 ‘사전’을 썼느냐, ‘주석’서를 썼느냐이다. 그런데 동우는 사전까지는 아니어도 주석서를 낸 것이다. 그것도 장장 두 권씩이나.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은 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우의 명성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글을 배우겠다며 찾아오니<인유종학자人有從學者> 그는<우遇> 선뜻 가르치려 하지 않았으며<불긍교不肯敎> 이렇게 말했.다<이운而云> 꼭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하며<필당선독백편必當先讀百遍> 또 말하기를<언言> 백 번을 읽으면 그 뜻이 절로 나니라.<독서백편기의자현讀書百遍其義自見>”
주자서는 공부를 일러 본받음이라 했고<효야效也> “공부는 마음을 기르고<학이양심學以養心> 또 이른바 몸을 기름이다<역소이양심亦所以養身>:고 했다. 그러므로 공부는 논어 학이편 첫 줄에서 습習이라 했다. 습習은 반복적으로 학습하라는 뜻이고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습習을 ”삭비야數飛也라<단옥재 설문해자注 138쪽上>“ 했으니 습習은 새가 날 수 있을 때까지 수없이 반복해서 날갯짓하는 것이다.
공부를 좀더 쉽게 풀어낸 이가 순자荀子인데 그의 권학勸學은 이렇게 기록한다. “군자가 공부하는 것은<군자지학야君子之學也> 학문으로서 그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고<이미기신以美其身>, 소인이 공부하는 것은<소인지학야小人之學也> 학문으로서 재물을 얻기 위함이니라<이위금독以爲禽犢>.”
각설하고 군자가 됐건 소인이 됐건 공부를 하면 그 몸을 아름답게 하든, 재물을 얻든, 좌우간 이득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存心편은 공부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일이란 만들면 생기지만<生事事生생사사생> 줄이면 줄어드는 법이다.<省事事省성사사성> 곧 공부라는 것은 한가할 때를 기다린다면 죽을 때까지 독서할 여가는 없다는 말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바꿔 말하면 없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시간을 비틀어 짜서 만들어서라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하다.
물론 공부라는 것은 실천을 목적으로 하며<강학상궁행講學尙躬行> 그러한 공부를 통해서 성현을 만나는 것이다.<견성현見聖賢> 주자께서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공부법을 말했는데 공부의 시작은 마음과 눈을 한곳에 집중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심안기전일心眼旣專一> 공부하는 사람은 환경과 처지에 함몰되거나 그것을 핑계삼지도 않는다. 논어학이편 1-14문장에서 “식무구포食無求飽 거무구안居無求安”이라했다. “먹는 데 배부름을 구함이 않으며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려서는 천지개벽이 일어 하늘이 기운다 해도 그런 황망경지의 와중도 공부는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