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공자님께 물으니<계로문사귀신季路問事鬼神>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사람을 섬기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미능사인未能事人>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언능사귀焉能事鬼>”
또 묻기를 감히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감문사敢問死>, 공자님 말씀에<왈曰> “산 것도 알지 아니하거늘<미지생未知生> 어찌 죽음을 알랴<언지사焉知死>”
공자님의 삶의 철학은 간단하다. 죽은 다음 날 아침에 있을 나의 자화상을 근심할 게 아니라, 지금 오늘을 열심히 살라는 게 공자님이시다. 자로가 계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소소한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계로는 자로의 또 다른 별칭인 바 자로가 공자님의 제자가 될 때에 가장 늦게 제자가 됐다 하여 ‘끝 계’ 또는 ‘막내 계’를 써서 스스로 계로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를 젊어서는 쓰지 않다가 60세쯤 되어서야 쓰기 시작했는데 노년의 자로는 젊은 날 공부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것에 대해 통렬히 아파했다는 전언이 있다.
자로는 공히 공자님의 첫 수제자로 맏형을 자처하는 자다. 공자님 문하에서 공부를 제외한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했고 공자님께서 가시는 길이라면 스스로 먼저 달려가서 혹시라도 길에 위험은 없는지 스승님께서 가시는 길에 불미스러운 점은 없는지를 미리 살피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 나서야 스승 공자님이 지나가시게끔 한 인물이다. 세상은 이런 자로를 향해서 의리의 돌쇠라 불렀다.
그는 공자님보다 9세 아래인 1기 제자로서 몇몇 동기들이 있는데 공자님보다 6세 아래인 안무요, 공자님보다 7세 아래인 염백우, 공자님보다 11세 아래인 칠조개, 공자님보다 5세 아래인 민자건이다. 공자님께 제일 먼저 부름받은 사람은 자로인데 자로는 고분하니 공자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들어온 자가 아니다. 자로는 노나라 변卞땅 사람으로 야인이라 했다. 여기서 야인이라 함은 좋게 말하면 불량배요 세게 말하면 깡패를 능가하는 참 몹쓸 인간이라는 말쯤 되는 말이다.
자로는 젊은 날 오로지 주먹 하나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자다. 그런 그가 공자님을 만나서 공부를 했고 훗날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다. 공자님께서는 생전에 3천 제자를 두시었고 그중에 육예를 통달한 제자가 72명이요 그중에 또 군계일학을 꼽는다면 공문10철 4과의 10명의 수제자 그룹이다. 10명의 수제자 그룹에서 정치에 뛰어난 제자가 둘인데 바로 자로와 염유다.<논어선진편11-2>
이는 공자님께서도 인정하신 바다. 젊은 날 공자님께서 제나라 군주를 만나러 갈 때 자로를 제외한 4명의 제자가 동행했다. 당시 자로는 공자님이 안 계시는 동안 공자학당을 지켜야 해서 갈 수가 없었다. 이때가 노나라 소공 25년 기원전 517년으로 제나라 군주는 경공이었고 재상은 안영晏嬰이었는데 경공은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교활에 가까운 군주였고 백성에 입장에서 볼 때는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이는 몹쓸 군주였다. 암튼 자로는 공자님이 아니계시면 공자님을 대신했고 공자님이 계시면 공자님보다 먼저 일어나서 공자님께서 하시는 일과에 대하여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먼저 세팅해 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의전담당, 비서실장쯤되는 이다.
논어 헌문14-41문장에 그 예가 기록되어있다. 자로가 석문에서 하룻밤을 자고<자로숙어석문子路宿於石門> 난 후 새벽에 먼저 일어나서 그 일대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새벽에 성문지기가 자로를 보더니 어디서 오는 길이냐 물었다.<신문왈해자晨門曰奚自> 자로가 대답하기를 공자님 계신 데서 오는 길입니다.<자로왈자공씨子路曰自孔氏> 쉽게 말해서 석문은 노나라 국경지대로 산적과 오랑캐들이 출몰로 안전이 위협받는 곳이다.<鄭玄 註> 자로는 석문이 속한 국경 마을에서 공자님께서 하실 일을 새벽에 먼저 일어나 점검하고 다니던 중 석문지기를 만난 것이다.
자로는 오로지 스승 공자님만을 존경한 인물이다. 사실 자로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공부를 길게 한 사람이다. 형문 선생 후중량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는 배워서 안될 이가 어디 있겠으며 가르쳐서 안될 이가 또 어디있겠는가. 누구든 배우고 가르치면 훌륭한 재목은 될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