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신광수가 만난 예인 (1)평양기 모란
■ 기고 / 신광수가 만난 예인 (1)평양기 모란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4.01.04 06:35
  • 호수 11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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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융마를 사랑한 모란, 석북 극진한 대접

석북, 예인으로서 모란에 진정한 찬사

기록을 찾아보면 석북 신광수가 만난 예인으로 화가 최북, 나무꾼 정초부 등 몇이 있다. 사료에 의거 평양기 모란 이야기를 풀어 썼다.(석야 신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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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하 창 ‘관산융마’ 악보
▲김월하 창 ‘관산융마’ 악보

1760년 경진 11, 49세의 석북은 관서로 먼 여행길을 떠났다. 말이 여행이지 실은 생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석북은 세모의 눈길을 헤치며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서천 고향을 떠났다.

눈은 왜 이리 깊이도 쌓이는가. 백발도 어설픈데 만리의 나그네길에 생자는 어디서 물어보아야 하나. 석북은 개성 낙타교를 지나 만월대, 선죽교를 거쳐 금천, 평산, 황주를 지나면서 여기서 시 한 수 저기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멀리 모란봉 부벽루가 보인다. 어느덧 평양에 이르렀다.

어느날 달 밝은 밤이었다. 평양성 연광정에는 불빛이 화했다.

석북은 연광정에 올랐다. 바람결인가 어디선가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바로 명창, 모란이 부르는, 가던 구름을 멈추게 한다는 관산융마였다.

여기에서 석북은 모란을 처음 만났다.

관산융마174635세에 초시인 한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 신광수의 과시이다. 방이 나자 바로 관현가사에 올라 만인에 회자되었다. 관산융마는 평양의 교방, 악원, 기방에서의 인기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창되었고 중국에까지 널리 회자되어 온 겨레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노래이다.

석북은 얼마간 모란과 함께 시를 읊으며 대동강변 누대에도 오르고 뱃노래도 즐겼다. 때로는 등촉 앞에서, 때로는 달 아래에서 관산융마를 들었다. 돈 많은 거상은 아니었어도 산해진미는 없었어도 석북은 시인으로서 모란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모란은 예인으로서 석북으로부터 진정한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세월은 10년도 훨씬 넘었다. 영월부사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석북은 장악원의 장악관 정광문을 통해 서울의 이원(기녀들에게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던 곳)에서 모란이 기녀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석북은 아직도 모란의 그때의 노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옛날 평양 연광정에서 들었던 모란의 관산융마를 이젠 서울에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세월은 그새 흘러 저만치 가버렸으니 모란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날 밤 석북은 잠을 밀쳐둔 채 붓을 들었다. 모란에게 시, <평양 기생 모란이 이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기에 장난삼아 두 수를 聞浿妓牧丹肄樂梨園戱寄2首〉를 써서 희증(戱贈)했다.1)

명기 모란이 머리가 희어 한경에 들어와 白頭名姬入漢京
그 노래 솜씨 만인을 놀라게 한다네 淸歌能使萬人驚
연광정 위에서 듣던 관산융마를 練光亭上關山曲
오늘밤 어쩌면 다시 들을 수 있을까 今夜何因聽舊聲

(내가 서주에 머물 때 모란과 함께 지냈는데 대동강변의 아름다운 정자에도 오르고 그림으로 꾸민 아름다운 뱃놀이도 즐겼다. 또 등잔불 앞, 달 아래에 함께 했는데 모란 이 나의 시 관산융마를 노래할 때마다 목소리가 지나가는 구름을 멈추게 했다. 余之 西遊 每携丹妓於湖樓畵舫問 燈前月下, 丹妓輒唱余關山戎馬舊詩, 響遏行雲)
-신광수,석북시집7, 聞浿妓牧丹肄樂梨園戱寄 其一 2)

이원은 남쪽 광통교 梨園南接廣通橋
지척에 신선 치마 약수가 멀다 咫尺仙裙弱水遙
듣자니 그대 고운 노랫소리 여전하다는데 廳說歌聲依舊好
얼굴은 벌써 잔주름이 잡혀있을라 秪應顔色到今凋 3)

관산융마를 불러주었던 그 때의 젊었던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어 이원(교방)의 선생님이 되어 서울에 왔다. 집에서 광통교 부근 이원은 지척이다. 목소리는 여전하다는데 그 옛날의 청아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얼굴에 주름살은 얼마를 더했을까.

이후 석북은 모란을 다시 만나 관산융마를 청해 들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얼마간 세월이 또 그렇게 흘렀다. 1774년 석북이 영월 부사로 있을 때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절친한 친구 채제공이 멀리 영월에까지 석북에게 감홍로 술, 삼등초 담배, 호모필 붓, 진유묵 먹을 선물로 보내왔다. 신광수는 받은 선물 하나마다 감사하는 시, <방백 체재공이 차와 술과 붓과 먹을 보내주셨기에(謝樊巖方伯茶酒筆墨之惠>를 쓰다가 문득 15년 전의 평양과 한 여인을 떠올렸다. 생계 자금을 구하러 아우들과 고향에서 서럽게 이별했던 바로 그 때의 서주여행이었다. 4)

아직도 석북은 포의한사 시절 그때 모란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석북은 조용히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십오년전 노새 한 한 마리 타고 十五年前騎一騾
포의 신세 초초히 평양을 다녀왔었네 西關草草布衣過
맑은 강 흰 성가퀴에서 두루 시를 읊었고 淸江白堞高吟遍
해질 무렵 붉은 난간에 쓸쓸히 기대었었지. 落日朱欄獨倚多
옥 술잔에 좋은 술이야 마시지 못했지만 玉椀雖空桂糖酒
고운 배에 그래도 모란의 노래 실었더라네 蘭舟猶載牧丹歌
이제는 적막하게 그저 옛일이 되고 말아 如今寂寞成陳跡
다시 가보지 못하고 늙어가니 어이하리 無計重遊奈老何

노새 한 마리에 의지해 초의 신세로 평양을 찾아갔던, 그저 시만 읊조리던 한사 시절이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난간에 홀로 쓸쓸히 기대였지. 어찌 감홍로 술 같은 명주를 입에 댈 수나 있었으랴. 그래도 모란의 아름다운 노래는 난주에 싣지 않았는가. 그 모란의 노래가 내겐 많은 위안이 되어주지 않았는가. 이젠 그도 옛일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가보지 못하고 늙어가니 이를 어이하리. 만년에 젊었었던 모란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석북은 이렇게 회억했다.

1774년 채제공에 써준 전별시 관서악부 44에서도 석북은 또 모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필을 들었다.

은촛대 금술잔에 깊은 밤 맑았는데 銀燭金樽子夜淸
높고 청아하게 드날리는 모란의 노랫소리 梁塵飛盡牧丹聲
지금은 흰머리에 비파 안은 여인 如今白首琵琶女
일찍이 이원에서 제일 이름을 떨쳤나니 曾是梨園第一名 5)

이원에서 제일 이름을 떨쳤던 청아한 모란의 노랫소리는 들을 수 없고 지금은 흰머리에 비파를 안은 여인이 되지 않았는가. 나이는 들었어도 석북은 못내 모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모란은 내 관산융마를 사랑해주었고 알아주었던 예인이 아니었던가. 석북이 이듬해에 갔으니 모란에 대한 이 시가 마지막이 될 줄을 운명은 어찌 알리.

석북이 일찍이 176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연경을 향해 가는 홍성원에게 준 시 송주청부사홍시랑성부연(送奏請副使洪侍郞聖源赴燕)7수에 홍부사가 평양을 지나갈 일을 생각하며 추증한우추증 又追贈」 두 수도 전하고 있다.

서글픈 옥소리 마냥 고왔던 모란의 노래, 聲如哀玉牧丹歌
관서땅 마흔 세 고을에 으뜸가는 미녀였네. 四十三州冠綺羅
달 밝은 대동강 밤 강물 위에서 明月大洞江上夜
관산융마 한 곡을 들은 들 어떠하리 關山一曲聽如何

- (丹妓善歌余關山戎馬詩故云-「又追贈」둘째 수)

 

사신으로 가는 길에 평양을 들를 터이니 석북은 모란의 관산융마를 꼭 들어보라고 권유까지 했다. “기생 모란이 나의 관산융마 시를 잘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왜 그가 모란에게 남다른 정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여 노래를 불러준 미모의 평양 여인이 바로 모란이었던 것이다. 6)

1760년 경 석북의 나이 49세 때 패강에서 만나 177463세 영월에 이르기까지 석북은 모란을 줄곧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 만년의 생애에 모란은 석북에게 어떤 여인이었을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그리도 컸었는가. 예인들은 단 한 번 만나도 일생을 잊지 못하기도 한다.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250년이 흐른 지금에도 아쉬움만 남긴 채 이리도 궁금하기만 하다.

모란은 평양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고 창으로도 으뜸이었으니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인가. 몇백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피리소리 수성반주와 모란의 목소리가 자금도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관산융마의 성조는 구슬프다. 수심가조의 곡조는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에게 많은 심금을 울려주었다. 일제하에서 서도창 관산융마를 듣고 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민족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온 노래가 아닐까 싶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누가 말했는가. 석북은 갔어도 관산융마는 남아 인간문화재와 제자들에 의해 지금도 꾸준히 불리워지고 있다.

명창은 명시를 알아보고 명시는 명창을 알아본다. 석북은 시인으로 모란은 가수로 당시를 풍미했던 진정한 예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8손 후손이 이제와 낮은 음으로 관산융마를 불러본다.

 

<주석>
1) 김동준,숭문연방과 일가문원,고령신씨의 숭문동 입향과 그 후예들(서천문화원,2014),85.
2) 신광수 <聞浿妓牧丹肄樂梨園戱寄三首> 문집10 23.
3) 신석초 역,석북 자아시집(명문당,2003),300-307.
4) 김동준, 앞의 책, 83-84.
5) 신석초 역, 관서 악부 44,석북 자하시집(명문당,2003), 542.
6) 김동준, 앞의 책,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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