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20일 비인으로 귀향해 살고 있는 정의연 작가를 만나 그가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롱빈의 시간’(나무와 숲 출판사)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전쟁으로 초토화가 된 한반도,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이 땅의 젊은이들은 또 다시 전쟁터로 내몰려야 했다. 1965년 10월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이다.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로 불리던 한국 육군 수도사단과 해병 2여단이었다. 이 무렵 이들을 전송하는 군가가 철모르는 시골 국민학생들에게도 불리워졌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부대 ○○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기성세대들, 특히 파병 군인들의 부모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파병 군인의 가정에서는 통곡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누적 30만명이었고 이 가운데 전사자는 5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을 사실적으로 그린 박영한의 장편소설 ‘머나먼 쏭바강’이 전쟁이 끝난 뒤 2년 후인 1977년에 나와 베트남전의 실상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어 1980년대에 들어서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과 안정효의 ‘하얀 전쟁’이 발표되었다. 세 작가들은 모두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전을 수행한 미국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했으며 ‘하얀 전쟁’에서 안정효는 “이 세상의 어떤 이념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안식과 사랑과 인간성을 희생시켜도 좋을 만큼 숭고하다는 말인가?”라며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다.
이후 부분적으로 베트남전을 다룬 몇몇 단편들이 있지만 한때 미군보다 더 많은 한국군 5만여명이 작전을 수행했던 이 전쟁은 차츰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오히려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에 한몫했다는 것만 각인되었다. 여기에 어느 대중가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라는 노래도 이를 거들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50여년이 흘렀다. 이제 베트남전은 대부분 사람들에게서 과거 속으로 묻혔다. 그러나 참전 군인들이 아직 생존해 있다. 그들은 지금도 베트남에서의 아픈 기억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다. 이를 주목한 작가가 서천 비인면에 살고 있다. 정의연 작가이다.
“10년 전 한 참전자로부터 그가 토해놓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문학이 이를 외면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그 일을 하겠다고 맘먹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대해 제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 후로 베트남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장편 소설을 기획한 정의연 작가는 그 후 많은 참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베트남을 세 차례 방문해 현지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한다.
고향 비인에 내려와 살면서 그는 10여년 동안의 각고 끝에 마침내 갑진년 새해 들어 장편 ‘롱빈의 시간’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여한 한국인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베트남전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을 이은 전쟁이고 아직 이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이는 다시 광주 5.18까지 이어집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그 군인들 베트남전에 지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베트남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넘어 소설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인간성을 파괴하고 황폐화시키는지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소설에 70대의 참전자 구자성과 20대의 젊은 주인공 윤이나가 등장한다. 윤이나는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이다. 그를 통해 베트남전을 이야기하며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평화의 이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문학평론가이자 서울과기대 문창과 교수인 최진석 교수는 정의연의 장편 ‘롱빈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그의 삶을 관조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구자성, 말 못 할 삶의 비밀을 감춘 남자. 이나는 그와 낯설고도 부담스러운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구자성이 밟아온 삶의 족적을 재구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적 삶과 동행하는 여정이다. 그가 겪은 고통과 번민, 트라우마의 역사마저 겪어내는 일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폭력의 가해자이자 그에 휩쓸렸던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은 인간 실존의 처참한 양면을 함께 살고 견뎌내는 과정이 된다. 롱빈, 그 낯선 지명은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함께 겪고 견뎌야 할 우리 시대의 아픔이 남긴 상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또 다른 전쟁이 기획되고 있다. 정의연 작가의 이 장편소설이 많이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는 10년 전부터 장편 ‘롱빈의 시간’에 몰두해 있는 동안에도 베트남전을 주제로 한 중편 ‘그 여자’와 단편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