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지녀야 하는 네 개의 성품이 있는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이다. 인은 어짊이요, 의는 의로움이요, 예는 예절이요, 지는 앎이다. 이것이 너무 방대하여 백성들이 지키기가 어려워 실생활과 좀 더 살갑게 와 닿으라고 축소해서 만들어낸 것이 예의염치禮義廉恥다. 예절과 의리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인의예지든 예의염치든 이러한 것들로 집안에 법도가 서 있다면 그런 집안 자녀는 흐트러지지 않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집안을 일으킨다. 그러나 부유하지만 집안에 이러한 법도를 갖추지 못한 가정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그 결과를 만나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맹자는 자신의 책 맹자 공손추장구상3-1문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맹자는 말한다<맹자왈孟子曰>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나니<인개유불인인지심人皆有不忍人之心>” 그러면서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는<무측은지심無惻隱之心> 사람이 아니며<비인야非人也>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무수오지심無羞惡之心> 사람이 아니며<비인야非人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무사양지심無辭讓之心> 사람이 아니며<비인야非人也>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는 자는<무시비지심無是非之心> 사람이 아니니라<비인야非人也>”
이러한 말들을 일러 벼리라고 말한다. 벼리라는 말의 전거는 서경에 있는 말로 서경반경書經盤庚 상上9문장에 이렇게 기록한다. “마치 그물<망網>에 벼리<강綱>가 있어야<약망재강若網在綱> 조리가 있어 그물이 헝클지 않는다<유조불문有條不紊>” 맹자의 사조이며 공자님의 가장 아둔한 제자라고 평가되는 증자는 ‘벼리’라는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벼리라는 말을 몰랐을 리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논어 술이편7-26문장 ‘자조이불망子釣而不網 익불사숙弋不射宿’에서 그 설명을 찾을 수 있어서다. 임의로 쉽게 풀어쓰면 “공자님께서는 낚시는 하시되 그물로는 하지 아니하시며, 새는 잡으시되 자는 새까지는 잡지 아니하시며” 라고 이해할 수 있다.
논어술이편7-26문장은 조이불망釣而不網과 조이불강釣而不綱 두 개의 판본이 전하는데 조이불강釣而不綱<망網>에서 강綱<망網>을 설명 안 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망網은 긴 줄에 많은 낚시바늘을 단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홍어 잡을 때 쓰는 주낙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리라. 망網은 상성양운上聲養韻으로 그물 망이고<백년옥편1368쪽> 강綱으로 읽을 때는 반절反切은 거랑절居郞切이며 음은 벼리강綱으로 읽는다.<교학대한한사전2487쪽-문자번호19659> 다만 증자는 당시에 공자님의 이런 말씀들과 설명들을 깨우치기에는 나이도 어렸고 더욱이 무엇보다도 이해력이 많이 부족했다. 추후 별도 지면을 통해 증자의 공부법을 따로 기술하겠지만 증자는 자신이 한없이 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야말로 무식한 공부법으로 대성한 인물이다. 흔히 증자를 일러 노력하고 싸워서 이긴 인물이라고 한다. 세상에 가장 무식하고 미련한 게 노력이라며, 노력은 얼마나 미련한지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는 게 증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노력과의 싸움에서 온몸으로 이겨버린 증자는 서서히 문리文理가 나기 시작한다. 그 결과를 대학 책에 명토박아 놓았는데 이른바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그것이다. 공부의 시작과 끝을 불과 아홉 자로 완성해 놓은 것이다. 물론 본인은 치국이라든가 평천하라든가에는 전혀 관심조차도 없었다. 자신은 둔하기 때문에 둔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면 자칫 하다가는 백성들이 굶어죽기 십상이라는게 증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백성을 치리한다거나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더 많이 해야한다는 게 증자의 생각이다. 이제 사연 많고 곡절 깊었던 해가 지나고 명실상부한 푸른 청룡의 해가 밝아왔다. 옛사람은 한 해의 시작은 1월에 있다 하여 새해 벽두부터 계획을 세운다 하는데, 거창하고 많은 계획보다도 소박하게 올해는 논어공부 최고로 많이 하는 해로 정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