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신광수의 영릉 참봉 유감
■ 기고 / 신광수의 영릉 참봉 유감
  • 석야 신웅순
  • 승인 2024.03.20 16:22
  • 호수 11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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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 뱃머리에 앉은 머리 허연 노시인 석북

“여강에서 읊은 시는 더욱 뜻을 얻은 것이었다”

서천이 낳은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는 문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시인이다. 채제공(1720~1799), 이헌경(李獻慶, 1719~1791), 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남인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인이 득세한 세상에서 출사할 수가 없었다. 50에 이르도록 향리 한산(韓山)에서 소일하던 중,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시행한 탕평책의 일환으로 영릉(寧陵) 참봉을 제수받고 첫 벼슬길에 나섰다.

석북 신광수의 후손 신웅순 교수가 최혜진 교수와 함께 지난 3월 초순에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영릉(寧陵)을 답사하고 감상을 적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효종 왕릉
▲효종 왕릉

석북에게 능참봉은 50세에 얻은 생애 첫벼슬이었다. 능지기는 종 9품 벼슬로 최하위 관직이다. 시와 글로 헛된 이름, 반세상을 은사로 살았으니 가난을 면치 못했던 석북이었다. 한사로 살아온 반세기인데 능참봉 제수인들 꿈에나 생각했으랴. 그래도 어버이를 봉양할 수입원이 생겼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마음이 설레었을까.

  시와 글로 헛된 이름 반세상을 살았네
  밝은 때 임금 명령 시골 사람 놀라게 하네
  일찍이 고관에게 벼슬 구할 생각 없었으나
  진실로 여강 사령장을 받들 마음은 있었네
  물 난간에 의지해 새와 고기 불러 작별하고
  산밭은 아우와 아들들에게 맡겨 갈게 했네
  원릉에 예를 갖춰 신하 직분 받들어
  아침에 부모에게 하직하고 북쪽으로 길 떠나네

    - 문제명(聞除命)1)

당시 석북은 관산융마의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진 인기있는 명사였다. 그러나 석북은 남인의 몰락으로 관직에 등용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벼슬을 구걸할 위인도 못되었다. 산밭 농토는 아우와 아들에게 맡기고 밤낮 서울로 길을 서둘렀다.

석북은 임금께 사은숙배하고 일찍 임지로 떠났다.
새벽 찬서리에 옷소매가 무겁다. 송파 나룻배에 올랐다. 멀리 아차산이 보인다. 50세에 첫 낭관이 되었으니 흰머리 능관 행차가 얼마나 초라했을까. 눈보라가 흰 머리칼을 적신다. 첫부임지로 떠나는 뱃머리에 앉은 머리 허연 노시인의 처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님, 여기가 석북 선생께서 머물던 효종 영릉 재실인가 봐요.”

맞아요, 여기예요.”

안내판 앞에 섰다. 능선으로 불어오는 산바람이 차갑다. 최 교수와의 모처럼 나들이었다. 능까지 걸으며 석북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영릉 재실
▲영릉 재실

재방은 평상시 참봉이 머물고 제사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는 곳이다. 석북 선생께서 3년 동안 여기에 계시면서 지극 정성 제사를 받들었을 것이다.

조선 왕릉의 재실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은 것을 복원한 게 대부분이다. 이곳 영릉은 조선시대 왕릉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 건축으로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학술적ㆍ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송백 숲 속을 지났다. 산언덕 저쪽이 영릉이다. 아래 오른쪽은 인선왕후의 능이다. 불현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며 부른 호풍음우가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 어디메오
  호풍도 차도 찰사 궂은 비는 무스 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 데 드릴꼬

청석령은 지났느냐, 초하구는 어디메냐. 호풍은 차고도 찬데 설상가상 궂은비는 또 무슨 일이냐. 뉘라서 내 초라한 행색을 그려내어 임금님께 드리겠느냐.

소현 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땅으로 끌려갈 때 청석령을 지나면서 부른 시조이다. 봉림 대군의 나이 18세였다. 힘들고도 긴 여정길이었다. 일국의 왕자가 비 맞은 생쥐꼴이 되었으니 이런 처절한 안타까움도 있는가.

숭명배청(崇明排淸),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외치며 절치부심, 북벌 계획에 모든 신명을 바친 효종이었다. 돌연 승하해 재위 10년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석북인들 이 한을 어찌 모르겠는가. 효종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 눈시울을 적신다.

  비바람 부는 청석령에 슬픈 노랫소리.
  효종의 남은 한 요동에 가득찼으리

- 우답부사유증운(又答副使留贈韻)2)

청석령은 병자호란으로 수 많은 조선 백성이 인질이 되어 울고 넘던 비운의 고개이다. 봉림대군은 궂은 비 내리는 청석령을 넘으며 한 맺힌 시조 한 수를 남겼다. 효종의 이루지 못한 그 안타까운 한이 드넓은 요동 땅에 가득 찼으리라.

  보게나 맑은 새벽 흩뿌리는 비를,
  구슬프게 황령이 구의산에 강림하네

   -영릉기신감음(寧陵忌辰感吟)3)

영릉기신에 구슬프게 하늘에서 새벽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청은 오랑캐, 조선은 소중화 이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4)

고 읊기도 했다. 복수설치를 하지 못한 효종대왕의 한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지극 정성 모셨고 수시로 능 앞에서 통곡했다 5) 고 술회했다.

효종이 승하한지 10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씻지 못한 병자년의 삼전도 치욕은 당시 선비들의 가슴 속에 서늘하게 남아있었다. 석북인들 어디 예외였으랴.

  향화를 3년 동안 받들었으니 
  의관은 만고의 언덕이라
  군신이 문득 헤어지려하는데
  석상아, 네가 무얼 말하고자 싶은 것인가
  슬프고도 슬프게 송백을 우러러보고
  머뭇거리며 묘문을 나선다
  원컨대 한식날 사신을 따라와서
  다시 태상 술잔을 올렸으면

   -사릉(辭陵)6)

계미년 늦가을 사옹봉사로 옮겨 3년 간 사관직을 다했다. 능을 하직하며 읊은 시이다.

영릉은 석북에게는 첫근무지였다. 이제 임금과 신하가 헤어져야한다. 석상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슬프게도 송백을 우러러본다. 석북은 아쉬움에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묘문을 나섰다. 한식날 사신을 따라와 다시 효종 대왕께 술상을 올려야겠다는 것이다. 몸이 병이 날 정도로 정성을 다했는데도 미련이 남았는가. 효종에 대한 사모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생애 첫관직, 효종능참봉은 인생에 있어 석북에게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부임한 지 삼년 째 되던 추운 섣달 그믐날이었다. 석북은 새해를 앞두고 능을 지키고 있었다. 가족이 몹시도 그리웠다. 부모를 비롯 삼남매, 두 아들, 세 딸을 생각하며 지은 7언 절구 9,제석잡영(除夕雜詠)이 있다.

막내딸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에미 없어 언제나 어린 딸 응석 가련했는데
  두 형은 새로 시집가고 아비는 서울에 있네
  여럿이 어울리며 등불 앞에 윷을 던지리니
  홀로 하늘가에서 면면이 생각하누나

    -제석잡영(除夕雜詠)-우억삼자(右憶三子)7)

석북이 아내와 사별한 지 7년이 되었다. 홀로 자식을 키워 두 딸은 여의였으나 막내딸만 남았다. 엄마 없이 자란 딸의 응석을 받아주었는데 두 언니도 시집을 갔다. 어린 딸은 지금 어찌 지내고 있을까. 형제와 어울리며 등불 앞에서 윷놀이를 하고 있을까. 어설픈 어린 딸의 모습이 면면히 눈에 밟힌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몸이다. 산중 영릉이다. 문지방 바람에 등잔불이 흔들린다. 밤 늦도록 가족을 그리워하는 석북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능참봉의 3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시는 외로워야하는가. 석북은 여강에서 가장 득의작을 썼다고 한다. 정해좌 또한 여강록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성현과는 뜻을 얻은 벗이고 여강에서 함께 읊은 시는 더욱 뜻을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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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숭문연방집(한국한문학연구회,1975),103.
2) 위의 책, 135. 이향배,석북신광수의 여강록 연구,석북 신광수의 삶과 문학세계(2006학술대회,2006),157쪽 참조.
3) 위의 책, 119.
4) 위의 책, 134.송주청부사홍시랑성원부연(送奏請副使洪侍郞聖源赴燕) 8
5) 위의 책, 135.송주청부사홍시랑성원부연(送奏請副使洪侍郞聖源赴燕) 10
6) 위의 책, 143.
7) 위의 책, 133, 이향배, 앞의 책, 160-16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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