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의견가 서정민갑 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유튜브의 한국영상자료원에 한국 고전영화들이 올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간단한 의견을 곁들여 여러 영화를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 이두용 감독이 1981년에 연출한 <피막(避幕)>이 눈길을 끌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할 만큼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 나도 관심이 생겨 찾아보았다. 영화는 한국적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에로티시즘을 가미했으며, 여인의 정절을 중시하던 양반 가문이 저지른 폭력과 그에 대한 한풀이를 기본 서사로 삼고 있다.
청상과부로 지내던 며느리가 욕정을 물리치기 위해 은장도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서 생긴 상처에 화농이 생기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마을 바깥의 피막에 옮겨놓도록 한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며느리의 정념을 풀어주겠다며 피막지기로 있던 삼돌이에게 합방을 강요한다. 피막지기의 간병으로 며느리는 살아나고, 이후 둘 사이에 정분이 생겨 며느리가 임신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소문이 날 것을 두려워한 시댁 식구들이 며느리와 삼돌이를 몰래 죽인다. 그 후 삼돌이의 딸이 무당이 되어 복수하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죽어가는 며느리가 머물도록 했던 장소인 피막을 국어사전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피막(避幕): 예전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안치하여 두던 외딴집.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풀이도 엇비슷하다. 이 정도 풀이로는 피막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국어사전의 풀이를 곡해하면 고려장을 치르는 곳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피막 항목에서 “전염병이 있을 때나 의례를 행할 때 부정을 예방하고자 환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할 때 사용하는 임시 거처용 움막”이라고 했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전염볌이 돌면 대책을 세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외딴곳에 움막을 지어 환자들을 격리시켜 병균이 퍼지지 않도록 했다. 이게 피막을 만든 주된 목적이었으며, 지역에 따라 임산부를 격리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동제(洞祭)를 지낼 때 임산부가 있으면 부정을 탄다고 해서 동제 지내기 전에 마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건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허황되고 반인권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나 과거의 풍습을 현재에 비추어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 속에서 피막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나온다. 늙어 죽어서 호상을 당한 사람 외에는 전부 거기다 옮겨 죽게 했으며, 혼령이 마을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게 마을 사람들의 설명이다. 덧붙여 어린애를 낳는 여자도 거기다 옮겨서 낳게 했으며, 피막은 저승과 이승의 중간 정거장 같은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과 끊는 순간을 피막에서 맞이하게 한 거라는 의미 부여와 함께.
피막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옛 문헌에는 피막(避幕)이라는 한자어가 등장하지 않으며, 병막(病幕)이나 피병소(避病所) 같은 말을 썼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 ‘피막’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는 한다. 그런데 원문을 확인하니 모두 출막(出幕)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낱말도 국어사전 표제에 있는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하여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막을 치고 옮김.”이라고 풀이했다. 조선왕조실록 번역자들이 출막을 ‘피막에 나가게 하다’ 정도의 뜻을 담아 풀이한 셈이다. 임산부들을 격리할 용도로 사용한 피막의 경우에는 산막(産幕)이나 해막(解幕)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