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지역답사를 다녀와서’
<지난호에 이어서>서산마애삼존불의 부처님들은 모두 세 분이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입상:서 있는 불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 왼쪽에는 보현보살상이 있다. 부처님들은 평소에는 무표정이지만 햇빛이 비추면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사랑과 자비가 한량 넘치는 그런 미소가 나타난다.
지금은 전기불로 껐다 켰다 하면서 부처님의 미소를 보고있다.
아름다운 서산마애삼존불을 뒤로 하고 남연군 묘에 갔다. 남연군 묘를 가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렸는데,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리 멀지도 않았다. 남연군묘는 그 묘지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다.
정만인이란 사람이 흥선대원군에게 덕산 땅에 두 사람의 황제가 날 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했다. 또 대대 손손 자손들이 번창할 명당도 있다고 말했으나 야망을 가지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황제의 명당을 택한다. 원래 남연군이 있던 곳은 경기도 연천이었는데,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지금 남연군묘 자리에 이장을 한다.
풍수지리설을 믿은 흥선대원군. 정말 그 말이 맞았는지 고종과 순종이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다.
비록 그리 잘나지만은 않은 왕들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연군묘는 대원군 개인에게는 권력을 쥐어주었지만, 나라의 운명이 잘못되는 고리 역할도 했다.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통상 요구를 했으나 이를 묵살한 보복으로 남연군묘를 파헤친 것이다. 오페르트가 대원군을 협상인질로 잡을 수단으로 사용한 이 분묘발굴은 우리의 주상숭배관습을 정확히 꿰뚫은 것으로 발굴이 실패하자 그것이 준 충격은 엄청났다.
대원군은 이것을 미리 알았는지 석고로 관을 봉해놨다고 한다.
이 충격으로 대원군은 오페르트에게 분묘 발굴을 사주한 것이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하여 대원군이 천주교 박해를 했고, 쇄국정치를 더욱 심하게 주도하였다.
남연군 묘가 명당이긴 명당인지 정말 내가 그 묘 앞에 있을 때에 편안함과 탁 트인 마음을 선사해주었다.
남연군묘를 견학하고 내려올 때에 선생님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 같았으면 대대손손 자손들이 번창하는 명당을 택했을 거예요” 라고.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니가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거야” 라고 말씀해 주셨다. 대원군은 풍수지리설을 완전 믿은 건 아닌 듯 싶다. 2대의 천자가 나올 거라고 했지. 누가 대대손손 천자가 나온다고 하였나? 이것도 대원군의 욕심인가보다.
남연군묘의 탁 트임을 멀리하고 마지막 견학지인 고건축박물관에 갔다. 고건축박물관은 우리나라 크고 작은 건물들을 축소시켜서 나무로 만들어 전시해놓은 곳이다.
이곳은 쇠못은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거의가 나무의 결과 결을 이어서 만들어놓았다.
부득이하게 못을 사용할 때에는 나무못을 사용하였다. 제 1박물관과 제 2박물관을 모두 견학 한 후 한쪽 마당에서 퀴즈대회를 했다.
내가 넌센스에는 약해서 넌센스를 맞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른 문제는 그냥 속으로 맞추었다.
마지막 문제! 내가 맞추고 싶었는데, 선생님께선 답사왕을 뽑으신다면서 나를 지목해주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했다.
다 열심히 했을 텐데 나만 받으니 참 되게 민망하네.
하지만 감사했다. 선생님께서 모두의 대표로 내가 받은 거라고 말씀해 주셔서 그나마 덜 미안했다.
차로 돌아서 오는 길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서천군민회관에 도착했다.
약 10시간의 여행이었는데, 피곤했지만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기분 그 하나만으로도 피곤함을 억누를 수 있었다.
서천군민회관에 도착하여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버스를 타고 왔다.
다시 한번 답사지역을 인터넷이란 간접매체로 살펴보았다.
내가 놓친 내용도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만족한 이 답사는 정말 최고였다.
선생님께 여쭤 보니 내년에도 또 있을 계획이라 하셨다.
내년에도 꼭 참여해서 나의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넓혔으면 좋겠다.
판교중학교 2학년 지하나
저작권자 © 뉴스서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