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의학칼럼
라뽀(Rapport)
김성기 의학칼럼
라뽀(Rapport)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4.12.31 00:00
  • 호수 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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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한 꼬마가 필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의사 선생님도 오줌을 누네요’라고 해서 웃은 일이 있다.

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다 보면 이렇듯 서로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는 일이 있다. 의사는 의사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상대방의 허상을 보게 되게 된다. 꼬마의 궁금하다는 표정을 뒤로하면서 문득 같은 생각을 해본다. 나도 환자를 질병의 색안경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는지.

라뽀(raport)란 프랑스어로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다. 카운슬링이나 심리요법에서 쓰이는 말로 병원에서는 의사-환자의 신뢰관계를 표현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어원을 살펴보면 ‘마음이 서로 통한다’ ’말한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느껴지는 관계를 뜻한다.

의사로서 진료현장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만날 때면 늘 라뽀를 생각하게 된다. 좋은 관계가 이루어져야 좋은 치료효과가 얻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환자는 자신의 주치의를 신뢰하고, 의사는 환자를 순응도가 좋은 환자로 관계를 맺어야 바람직한 치료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늘 경험하는 일인데 환자와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특별한 약물처방이 없이도 조언과 격려만으로 쉽게 병이 회복되는 반면 라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어떠한 처방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동료의사들의 고충을 듣다보면 어느 환자와 라뽀가 원만치 못해 병의 경과가 안 좋다는 푸념을 자주 듣는다.

한 번 신뢰가 깨지면 여간한 노력을 해도 회복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다보면 의사나 환자 모두 불편할 뿐 아니라 환자에게는 병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신뢰에서 얻어지는 효과란 비단 의사-환자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관계와 만남에서 그러하지 않겠는가.

상대방을 믿는다는 것은 실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동력에 비유하고 싶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 친구, 동료 사이의 믿음과 라뽀는 가정과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는 더할 것 없는 묘약과 비방이리라 생각한다.

다시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그간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많은 아이들, 보호자와 만족스런 관계를 맺었는지 돌이켜 본다. 늘 그렇듯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먼저 떠오른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환자를 대해야 하는 사정을 핑계로 소홀함이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좀 더 세심했어야 했다는 자책과 함께 새해는 좀 더 믿음이 가득한 진료실을 가꾸리라 소망해 본다.

새해에도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늘 건강과 라뽀가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서해내과병원 소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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