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27) / 혼꾸멍
■ 박일환의 낱말여행 (27) / 혼꾸멍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12.22 19:04
  • 호수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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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꾸멍', 명사가 아니다?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혼구멍이 맞을까. 혼꾸멍이 맞을까? 모르긴 해도 상당수가 혼구멍으로 써야 맞지 않느냐고 할 듯하다. 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혼구멍이 아니라 혼꾸멍으로 써야 한다고 알려주면 규정이 뭐 그러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도 같다. 그런 의아심과 상관없이 국어사전에서는 혼구멍을 찾을 수 없다.

국립국어원이 혼꾸멍을 표준어로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서 두 낱말을 결합시킬 때 어원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거나 본뜻에서 멀어졌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원형을 밝혀 적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혼과 구멍의 결합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거나,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혼구멍이 혼과 구멍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유로 둘을 결합시켰을까 하는 점을 설득력 있게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왕이나 지체 높은 사람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 가면 신주(神主)라는 게 있다. 신주는 죽은 이의 이름 등을 적은 위패를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 신주를 만들 때 위아래와 양옆에 구멍을 뚫었다.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에서 만들어 시행한 의례는 대부분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 역시 왕을 기리는 사당에 신주를 모셨다. 신주는 보통 밤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일반인들은 그냥 종이로 만든 지방(紙榜)을 사용한다. 그래서 본래 나무로 깎아 만들던 신주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구멍 뚫린 신주를 만들어 세울 만큼, 즉 죽을 만큼 혼을 낸다는 의미로 혼구멍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했을 거라는 이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합당할까? 낱말이란 건 처음에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법이다. 혼구멍 역시 마찬가지다. 국립국어원은 혼구멍이라는 말과 신주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다는 쪽에 서 있는 듯하다. 그래서 혼구멍 대신 소리 나는 대로 혼꾸멍이라고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은 각자 내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더 짚어볼 사항이 있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혼꾸멍을 독립된 낱말로 인정하지 않고 혼꾸멍내다혼꾸멍나다만 동사로 취급해서 표제어로 삼고 있다. 반면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혼꾸멍을 명사로 인정해서 ()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너 나한테 혼꾸멍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니?”라든지 이참에 혼꾸멍을 내줄까 보다.”와 같은 형태로 혼꾸멍을 명사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들어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한 사람이 있다. 그랬더니 어떤 답변이 나왔을까?

혼꾸멍을 내다와 같은 문형이 존재하지만, 현재 혼꾸멍과 같은 한 단어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사전에 실려 있는 대로 혼꾸멍내다처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런 답변에 만족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려대한국어대사전처럼 혼꾸멍을 명사로 인정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그럴 수고를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국립국어원에게 혼꾸멍을 내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그런 말에 귀를 닫는 것으로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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